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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4 서천군 장항기행 게시판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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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테마4 서천군 장항기행
작성자 전체관리자 등록일 2015-12-29 조회 12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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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장항제련소 굴뚝 - 격동의 근현대사 보고서

충남 서천군 장항의 무역항구인 장항항. 이곳에 서서 멀리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눈에 들어오는 기다란 굴뚝 하나. 마치 정승처럼 장항을 지키고 서 있는 이 굴뚝은 장항의 상징이자 장항 역사의 유일한 목격자. 장항제련소 굴뚝이다.
1936년 일제강점기 시절 태어난 이 굴뚝은 서천의 장항의 120m의 전망산 바위산에 자리하고 있다, 90m나 되는 장신을 자랑하며 강력한 빨강과 흰색의 줄무늬 옷을 입고 우뚝 서 있다. 장항제련소가 문을 열고 53년간 묵묵히 연기를 내뿜던 그는 1989년을 이후로 은퇴를 선언한다. 이제 더 이상 연기를 내뿜지는 않지만 그가 주는 상징성은 지금도 강렬하다. 서해안을 항해하는 선박들의 이정표 역할을 하기도 하며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당시 중요 지형물의 역할까지 톡톡히 감내했다. 이제 그런 그가 2016년이면 80세이다. 이제는 유명세를 다한 노년의 장항의 스타이지만 이래봬도 한 때는 대통령이 찾아오던 그이기도 하며 초등학교 교과서 표지를 장식했던 한국 근·현대 경제사의 스타이다.
사실 장항의 발전의 시작은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다. 1930년에 장항항이 개항하고 곧 이어 1931년, 장항선 철도가 들어서며 장항은 점차 발전하기 시작했다. 기차와 항로를 통해 우리나라의 수많은 금과 은, 식량들이 수탈되었다. 장항제련소도 당시 국제 통화수단이었던 금을 생산하기 위해 지어진 목적이 크다.
하지만 다행히도 장항의 전성기는 광복 후에 찾아온다. 광복 후 장항항은 국제항으로 승격된다. 또 장항제련소는 한국광업제련공사로 재설립 되면서 1971년에는 민영화를 이루고 1974년 1만 5천 톤, 1976년 5만 톤 규모로 확장되면서 우리나라의 산업화에 기여한다. 그렇게 우리나라 산업화의 선두주자 격인 제련소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장항에 몰려들었고 60-70년대 경제발전에 큰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그의 전성기도 잠시, 장항제련소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로 인한 환경문제 등이 이슈가 되면서 1989년 장항제련소는 폐쇄가 된다. 그 후 점차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고 이제는 사람들이 점점 떠나 조용한 어촌 마을이 되었다.
지금도 장항에 가보면 장항의 전성기를 떠올릴 만한 근대유산이 흔적이 되어 곳곳에 남아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빨간 벽돌이다. 유난히도 빨간 벽돌로 지어진 집이 많이 보이는 장항. 이유는 슬래그 벽돌이다. 슬래그란 제련소에서 금속을 녹이고 남겨진 물질로 붉은 빛을 흙빛을 띤다. 당시 슬래그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많았기 때문에 지금도 빨간 벽돌집은 장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다. 또 일제가 미곡을 수탈하기 위해 쌀을 보관할 용도로 지어진 미곡창고는 이젠 문화예술 창작공간으로 변신했다. 독특한 형식의 철근 콘크리트로 독특한 건축기법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쌀 수탈의 역사적 증거물로 남아 등록문화재 제591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기도 한다.
또한 이제는 교장 사택만 남아있는 1930년대 농업전수학교 건물, 중국집이 되어버린 장항극장, 서천군미디어센터로 탈바꿈한 중앙극장, 장항 지역 최초의 교회인 장항교회는 현대식 건물로 새로운 옷을 입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황금정마을이라 불리던 장암리, 또 신창리에는 지금도 일제강점기, 근대기 시절을 떠올릴 번한 건축양식을 지닌 건물들만 남아 장항을 지키고 있다.
이처럼 장항은 우리나라 근대화의 상징적인 공간이다. 숱한 장항의 한 세월을 목격한 유일한 주인공인 제련소 굴뚝. 사실 억울한 면도 없지 않다. 한창 부려먹을 때 묵묵히 일해 왔던 것은 사람들이 전부 잊은 모양이다. 이제는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찍혀 보존이냐, 개발이냐, 철거냐 굴뚝을 두고 제각기 말들이 많다. 이제는 애꿎은 애물단지로 전락해버렸지만 그래도 그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흔적은 남아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시인인 고은 선생은 어린 시절 묵묵히 연기를 내뿜던 장항제련소의 굴뚝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장항제련소 굴뚝에서 늘 영원감(永遠感)을 체험했다. 장항제련소의 굴뚝과 그 긴 연기야 말로 내 운명의 서장(序章)" 마치 굴뚝이 일하는 연기를 바라보며 자신의 평생을 시인으로서의 삶을 결단했는지도 모른다.
서천 출생의 시인 나태주에게도 장항제련소의 굴뚝은 젊은 시절의 추억을 투영하는 도구인 듯하다. ‘산 위에 올라가면 장항제련소 굴뚝의 연기가 하늘에 나래 편 커단 새같이만 보였었지’ 시인의 <막동리를 향해서>라는 시 일부에 기록된 내용이다. 이제는 머릿속에만 남겨진 커다란 날개같던 굴뚝의 연기, 그 속에는 젊은 날의 그리움과 추억과 꿈이 서려있는 듯하다.
소설가 박범신의 기억에도 장항제련소는 선명하다. 박범신의 소설 ‘소금’에는 '아버지는 그 무렵 서천 죽산리에서 염전을 일구고 있었다. 맞은편으론 군산항이, 왼쪽으로는 장항제련소의 드높은 굴뚝이 빤히 건너다보는 곳이었다' 라는 내용이 나온다. 아버지가 열심히 일하던 모습 뒤로 묵묵히 연기를 내뿜던 장항제련소 굴뚝을 소설가는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랜시간동안 이 곳에서 세월을 같이한 장항 주민들의 회고에도 굴뚝은 살아있다. "그 때는 장항제련소 다닌다고 하면 서로 딸을 주려고 했지요.", “옛날에 제련소 다닌다고 하면 제법 알아주던 시절이 있었죠.” 서로 자신의 딸을 제련소 직원과 결혼시키기 위해 안달이었다는 것을 먼저 떠올릴 만큼 그 시절 장항은 화려했던 면모를 뽐냈던 듯하다.
장항.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인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과 애환이 함께 컸던 도시이다. 일제의 아픈 과거를 딛고 광복 후 삶의 터전으로 자리 잡았고. 이제는 이면의 환경문제를 남겨두어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굴뚝. 우리가 간직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시절, 그 역사가 우리에게 남겨준 시대에 대한 성찰과 깨달음일 것이다.
그저 제련소의 굴뚝을 보며 애물단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역사를 재조명하고 의미 있는 유산으로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 지금 현 시대 남아있는 우리의 과제이다.



테마 4 장항제련소 굴뚝
②문학 속의 굴뚝과 장항제련소

장항, 갈대만 무성했던 긴 목에 읍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볼 것 없던 이 땅이 70-80년대 우리나라 근대화와 산업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1935년에 지어진 장항제련소가 크게 한 몫을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36년 조선제련주식회사로 설립되어 우리나라 비철금속제련의 중추적 역할을 해온 장항제련소는 2016년이면 벌써 팔 십 해를 맞는다. 1989년 이후로 이제는 더 이상 연기를 내뿜지는 않지만 지금도 장항제련소는 장항의 가장 상징적인 명소이라는 것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제는 노쇠한 산업역군이지만 누군가는 계속해서 장항제련소의 굴뚝을 기억하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기록해왔다. 많은 문학가들도 장항제련소 굴뚝을 추억하고 기록했다. 장항의 역사 80년, 훌륭한 문인과 그들의 문학작품에 투영된 장항의 모습과 의미는 과연 어떠할까.
한국 현대시사의 '큰 시인'이라 불리는 고은, 어린 시절을 금강주변에서 지내온 고은에게 장항제련소는 꽤나 선명한 기억이다. 이는 고은 시인의 회고담에 여실히 기록되어 있다. '장항제련소 굴뚝과 그 긴 연기. 금강 건너의 장항제련소 굴뚝을 멀리 바라볼 때마다 대책 없는 영원감이라는 느낌이 생겨났지. 장항제련소의 굴뚝과 그 긴 연기야 말로 내 운명의 서장(序章)이었어." 어린 시절의 고은은 평생 시인으로서의 운명적 삶을 예감이라도 했던 것일까. 한 없이 피어오르는 굴뚝의 연기를 바라보며 대책 없는 ‘영원감’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다. 어쩌면 그의 특유의 아름다운 문체 역시 어린 시인이 제련소의 굴뚝을 바라보며 느낀 고백과 생각들의 점철의 끝은 아닐까.
고은 외에도 국내 최고의 소설가이자 국문학자인 구인환의 어린 시절에도 장항의 의미는 깊다. 장항에서 출생하고 자란 그의 소설에는 옛 모습의 장항을 쉽게 떠올려 볼 수 있다.
'장항은 금강의 문턱으로 백제의 기벌포의 한을 되새기고 있는 항구. 기벌포를 안 보고 장항을 볼 수 없고, 백제를 알 수가 없지 (중략) 멀리 제련소의 연기 없는 연돌이 하늘에 떠 있고 (중략) 역전 슈퍼나 식당도 옛날 그대로요, 길목 신부락에 이르는 골목도 옛날 그대로 조용히 잠들어 있다'. 구인환의 소설 '기벌포의 전설' 중 일부다. 이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소설가가 그리는 어린 시절의 장항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아마도 쉴 틈 없이 뿜어져 나오는 장항제련소의 굴뚝과 북적북적한 장항항의 모습. 이제는 비록 연기가 그치고 조용한 마을이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소설가의 머리 속에 굴뚝 연기의 잔상들과 그리고 그 시절 장항의 풍경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장항의 옛 모습은 소설을 통해 화자에게 살아 전달된다.
서천 출생의 시인 나태주에게도 장항제련소 굴뚝은 추억이다. ‘산 위에 올라가면 장항제련소 굴뚝의 연기가 하늘에 나래 편 커단 새같이만 보였었지. 지게 끝에 걸리는 마을연기 매캐한 고랫재 내움 벼타작 마당에서 부르고 대답하는 사내들 힘찬 목소리’ 시인의 <막동리를 향해서>라는 시 일부에 기록된 내용이다. 굴뚝의 연기를 떠올리면 함께 되살아나는 기억들이 시인의 젊은 날, 꿈과 그리움, 희망을 투영하고 있다.
장항제련소의 굴뚝 외에도 많은 시인들에게 장항과 금강은 작품활동의 소재이자 원동력이다. 안도현의 시 <금강하구>에서 장항과 금강하구는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의 공간이 되어 나타난다. '시도 사랑도 안되는 날에는 친구야 금강 하구에 가보아라 (중략) 장항제련소 굴뚝 아래까지 따라온 산줄기를 물결로 어루만져 돌려보내고 (중략) 영차영차 뒤이어 와 기쁜 바다가 되는 강물을 하루 내 갈대로 서서 바라보아도 좋으리' 시인은 사랑도 일도 안되는 날에 금강하구를 가보라고 말한다. 아마도 시인에게 금강하구는 바라만 봐도 사랑과 삶이 회복되는 따스한 공간으로 투영되는 듯하다. 조재도의 <금강하구>에서의 장항의 모습은 더욱 예사롭지 않다. '알맹이는 쑥 빼먹고 껍데기만 남았주 난로를 끼고 앉아 사내 투덜거리고 도마질하는 아낙 조기찌개에 점심을 먹고 나서 비린내 가시기 전 담배를 문다 새치름히 흐린 품이 눈이라도 올 듯하다' 한 때 전성기를 누렸던 화려한 땅에서 이제는 연기가 그치고 오가는 사람이 적어진 조용한 마을로 변화한 장항의 모습에서 마치 굴곡 있는 인생사의 모습을 담아낸 듯한 표현이 눈에 박힌다. 또한 박범신의 소설 <소금>에서도 장항의 모습은 우리의 인생을 투영한다. '아버지는 그 무렵 서천 죽산리에서 염전을 일구고 있었다. 맞은편으론 군산항이, 왼쪽으로는 장항제련소의 드높은 굴뚝이 빤히 건너다뵈는 곳이었다. 그 곳에선 하루 종일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 않았다' 장항은 소설가의 옛 유년시절의 기억이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들춰내는 추억의 장소로 나타난다. 또 어떤 시인에게 장항은 헤어짐이 아쉬운 애틋한 사랑의 공간이다. 곽재구의 <포구기행>에서 시인은 장항과 군산의 사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장항과 군산 사이를 오가는 여객선을 타면서 이 두 도시에 사는 연인들은 서로 이별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을 했다. 15분인 편도 뱃길을 바래다주며 헤어지기가 싫어서 다시 돌아오는 배를 함께 타고 막상 한쪽의 도착지에 이르면 또 다시 헤어지기가 싫어서 맞은편의 항구로 함께 가고...'
다양한 모습이지만 장항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과 그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에는 수많은 문학가들의 삶이 녹아져있는 것이 느껴진다. 누군가에게는 추억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인생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역사가 되는 이름 장항. 그리고 장항제련소의 굴뚝. 시인과 소설가가 또 장항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생명력을 불어 넣듯이 이 곳에 서린 추억들을 되삼아 새롭게 활용해야 할 근대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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