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기벌포 이야기(인포그래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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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전체관리자 | 등록일 | 2015-12-29 | 조회 | 5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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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 기벌포 이야기
①대망(大望)의 바다 기벌포 - 평화와 번영의 땅 서천 서천군 시초면 풍정리 산성, 이 곳에서 5세기 중후반 백제시대의 대형 천제단이 새롭게 발굴되었다. 백제의 왕은 왜 서천의 땅에서 하늘과 그리고 바다를 향해 제사를 지냈을까? 서천은 옛 백제의 수도 사비성의 중요한 거점지역이었다. 백제부흥운동의 본거지, 주류성으로 알려진 건지산성과 서천 해안가 인근에 10여 개의 산성 터는 이를 묵묵히 웅변하고 있다. 또한 비옥한 강과 바다가 접하는 지역인 서천은 교류왕국이자 문화강국인 백제의 군사·외교적 관문이었다. 이 같은 사실 역시 끊임없이 발견되는 30여 개의 백제시대 고분과 유물들이 증거하고 있다. 금강을 따라 바닷길을 열어 동북아의 강국으로 웅지를 품었던 대백제, 바로 서천의 천제단은 그 대망의 희원을 품었던 기원의 장소이다. 하지만 ‘대망의 꿈’은 아직 바다에 잠들어 있다. 1,400여 년 전, 나당연합군의 공격이 시작되고 이후 흥망을 가른 세 차례의 국제해전은 서천의 바다를 핏빛으로 물들여 놓았다. '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 이 같은 내용은 삼국사기에도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치열한 격전의 결말은 백제의 패망과 삼국통일. 기벌포 해전은 백제, 일본, 신라, 당나라가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전쟁하였던 동북아시아 최초의 국제 해전이다. 그러고 보면 기벌포는 한·중·일 패권과 평화로의 희원이 공존하는 지역이다.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장 드라마틱한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백제사의 관점에서 기벌포 해전을 단지 패망의 역사로만 인식하여야 하는 것일까. 그런 점에서 새롭게 각인해야 할 시대적 가치가 분명 존재한다. 이는 ‘과거의 전쟁으로부터 인류는 늘 평화를 꿈꾼다.’ 는 메시지이다. 동북아 문화강국으로서 진취의 웅지를 끊임없이 펼치고자 했던 백제의 한과 얼이 기벌포 바다에는 고스란히 잠들어 있다. 또 중국인이 숭배하는 당의 장수 소정방, 유인궤, 설인귀의 함성이 깃든 곳이기도 하며 백제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백촌강 전투' 투어 코스가 기벌포이다. 기벌포는 고대 동북아 패권의 격전이면서, 1,400년 후에도 한·중·일이 교감하며 옛 역사를 반추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최적의 역사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평가될 만하다. ‘전쟁과 도발’이 아닌 ‘평화와 화합’이라는 인류의 오래된 소망을 새롭게 각인하고 시대적 가치로 되새길 곳이 바로 기벌포 바다이다. 지난 2015년 3월에 개장한 기벌포 해변의 ‘장항 스카이 워크’. 높이 15m, 총 길이 286m의 나선형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기벌포 해전 전망대’가 보인다. 전망대에선 넓게 펼쳐진 기벌포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고 장항제련소의 높은 굴뚝까지 조망된다. 장항의 푸르른 송림을 뒤로하고 해송의 솔내음을 맡으며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스카이워크 길을 걸으면 마치 하늘을 가로지르는듯한 황홀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또한 이곳에 인류의 오래된 소망이 내재되어 있다. 기벌포 해전의 치열한 격전 현장을 떠올리며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기원하는 새로운 명소이다. 스카이 워크의 기벌포 해전 전망대에 서서 옛 백제왕이 서천의 바다와 하늘을 향해 제사를 올렸듯이 평화와 번영의 땅 서천에서 진취적 웅지를 곧추 세우며 모두의 안녕과 화합을 기원하게 된다. ‘지금 바라다보고 있는 기벌포 저 서해바다는 말이 없지만 잠깐만 눈을 감으면 한 뼘의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백제군, 신라군, 일본군, 당 군대가 목숨을 내걸고 부르짖는 함성이 귓전에 다가온다. 오늘날 1,400여 년 전 역사적 사건을 거울삼아 대한민국, 일본, 중국이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하여 최초 동북아시아 국제전쟁터 기벌포에서 '기벌포 평화선언'을 할 때이다’. (스카이 워크 표지판의 기벌포 해전 설명 중에서) 테마 1 기벌포 이야기 ② 서천의 백제전설 한 때 서해를 다스리며 광활한 해상왕국을 건설했던 백제,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은 지금의 서천 지역으로 알려진다. 때문에 서천은 백제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땅이다. 또한 백제의 멸망 이후 부흥 운동의 본거지였던 주류성이 서천의 비인이었다는 설이 전해지면서 서천은 그야말로 백제의 아픔이 서려있는 땅으로 조명 받고 있다. 실제로도 서천에는 백제와 관련된 많은 전설들이 내려오고 있다. 장항읍부터 한산면, 화양면, 마서면, 기산면, 마산면, 판교면, 종천면, 비인면에 이르기까지 1개의 읍과 8개의 면에서 다양한 백제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 중 가장 많은 전설이 전해지는 지역은 화양면이다. 금강변이 맞닿아 있는 화양면은 예로부터 살기가 편해 백제 유민들이 처음으로 정착했던 곳이기도 하고 충신들이 귀양을 지내던 곳으로도 알려지고 있다. 예로부터 사람이 많았던 지역인 기산면에도 비슷하게 유민들과 관련된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또한 웅진기부터 중앙의 정치적 세력이 미쳤던 곳으로 알려진 한산면에는 백제의 왕들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전쟁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마산면에는 백제 말 백제부흥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던 지역으로 이와 관련된 설화들이 내려져오고 있다. 이처럼 지역의 특색뿐만 아니라 왕들의 이야기, 백제 말 전쟁이야기, 멸망 후 유민들의 이야기 등 백제의 다양한 전설 이야기를 살펴보면 지난 날의 백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먼저 서천과 얽혀 있는 백제왕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다. 그 중 하나가 장항읍 원수리에 있는 ‘왕제산 이야기’이다. 왕제산은 구룡말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산이다. 옛날 백제왕들은 직접 왕제산에 올라와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또 한산면에는 백제 동성왕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도 전해진다. 동성왕 23년에 사비로의 천도를 위해 자주 전렵을 나왔었는데 한 번은 폭설로 인해 마포촌이라는 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 때 지방으로 전출 돼 동성왕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좌평 백가가 마포촌으로 자객을 보내 왕을 시해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 마포촌 이야기는 한산면의 옛 이름이 마산, 마읍인 것을 볼 때 서천의 한산이었던 것이 유력하다. 또한 화양면 고마리에는 이름 모를 묘가 둘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백제 말의 의자왕의 보필했던 충신 좌평 성충의 묘라고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서천에는 찬란한 백제의 역사를 지나 멸망의 길로 접어 서게 된 백제 마지막 이야기가 곳곳에서 전해지기도 한다. 이야기 속에는 나·당군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웠던 백제의 용맹스러움이 곳곳에 서려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이야기는 한산면 동산리에서 전해진다. ‘동자북 마을’이라 불리는 이 곳은 마을 한 가운데 커다란 북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배경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한 19명의 동자들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백제가 나·당군에 점령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19명의 동자들은 나라의 마지막 왕자를 지키기 위해 뒷산에서 나당 군을 맞서 싸우게 된다. 매일 건지산에서 무예를 연마하던 이들은 용감히 싸우다 모두 전사한다. 자신들의 죽음을 이미 예감이라도 한 것인지 흙을 파두었던 이들은 전사 후에 떨어진 빗방울에 휩쓸려 뒷산에 묻히게 됐다. 그 후로 비가 내리는 날이면 땅 속에서 북소리가 들렸다고 하여 동자북 마을이라 불리게 됐다. 지금도 이곳에 설치된 북을 19번 두드리고 소원을 빌면 동자승이 소원을 들어준다는 이야기가 있어 많은 방문객들의 북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다. 한산면는 예로부터 산신당과 용당이 함께해 신령한 산으로 전해지던 봉황산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성스러운 산을 지키기 위해 장수가 바위 속에 들어가 칼을 꽂아들고 지켰다는 전설도 전해지며 또한 백제 말, 당나라군과 백제군이 봉황산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재미있는 것이 장수들이 혈투 끝에 잠시 오줌을 누던 바위가 지금도 있다고 한다. 오줌을 누운 곳이 깊게 패여 있어 지금까지도 마르지 않고 있다고 한다. 마산면 벽오리에서도 백제의 용맹스러움을 익히 보여주는 설화가 있다. 백제 말, 사비성이 함락되자 백제 무장 중 한 명이 부하 몇 명과 주류성으로 피신해 온다. 이곳에서 풍 왕자와 복신좌평과 백제 부흥 운동을 준비하던 무장은 나당군의 공격을 받게 된다. 장수는 용감히 맞서 싸웠으나 수에 밀려 말고삐를 돌리게 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말이 장수의 말을 듣지 않고 전쟁터를 향해 울부짖기 시작한다. 말의 눈빛을 읽기라도 한 걸까. 장수는 후퇴하려 하다 다시 한 번 나·당군과 맞서 싸우게 된다. 하지만 또 다시 수에 밀려 또 다시 피신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도 말은 끝까지 전쟁터 쪽을 향해 꼼짝하지 않는 것이다. 그곳을 가면 개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알고 있는 무장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말의 목을 칠 수 밖에 없게 된다. 끝까지 피를 뿌리며 죽어간 장수의 말. 이런 말의 용맹스러움을 기억하고자 했던 뜻이 있던 걸까. 말이 죽은 자리에서 큰 바위가 솟아났다고 한다. 이 바위의 이름이 ‘안장바위’이다. 지금은 물에 잠겨 볼 수는 없지만 백제의 용맹스러움을 고스란히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말들도 백제의 운명을 알고 있던 것일까. 용맹스럽고 충성스러운 말에 얽힌 설화는 마서면 에서도 전해진다. ‘죽진’ 이라고도 불리는 마서면 죽산리에서는 복신좌평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말을 감추어 놓고 기병을 대기시켰던 곳이다. 성이 함락되고 백제군이 나·당군에게 쫓기게 되자 백제군들은 묶여 있던 자신들의 말을 모두 풀어 도망치게 한다. 말들은 주인의 도움으로 모두 풀려났지만 밤만 되면 주인을 찾는 듯 구슬프게 울었다고 한다. 백제부흥운동을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알려진 서천에는 이와 관련된 설화들도 많다. 내용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나라를 지키기 위한 백제의 투쟁이 살아있는 듯하다. 화양면 금당리 남쪽의 금하마을에서도 이러한 설화가 내려온다. 금하군사주둔지라 불리던 이 곳은 나·당군의 공격을 끝까지 완강히 저항하던 백제군을 피해 일시적으로 당나라가 피신했던 곳으로 전해진다. 또 마산면 군간리에는 전장촌이라 불리던 곳이 있는데 백제 부흥군이 나·당군에 밀려오면서 끝까지 저항한 싸움터로 알려져 있다. 이름의 뜻도 부흥군의 마지막 거점지라는 뜻을 담아 ‘전장촌’, ‘전정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화양면 화촌리는 주류성에서 살던 백제 유민들이 성이 함락할 위험에 처하자 성을 버리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정착한 곳이라 하여 ‘동아시’라고 불리던 지역도 있다. 백제 멸망 후 남아있는 유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지역 설화들도 눈 여겨 볼만 하다. 기산면 두남리 ‘고란동’, ‘고란열’이라고도 불리던 마을에는 유독 난이 많이 피는 곳으로 전해지는데 그 이유가 백제부흥운동에 실패한 백제 유민들이 부락을 꾸리며 살던 곳으로 그 슬픔이 서려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산면 두북리의 지명 이름도 유민들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곳에 살던 유민들은 나라를 잃은 슬픔에 문을 달아 걸어두고 밖에 나가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두문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두북리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서천의 대표 술인 한산면 ‘한산 소곡주’에도 알고 보면 나라를 잃은 백제 유민들의 눈물이 맺혀 있다. 나라 잃은 그 설움을 삼키기 위해 유민들이 소복을 입고 빚어낸 술이 바로 소곡주이다. 그리하여 ‘백제의 눈물주’라고도 불리는 이 술은 지금도 특유의 끈적끈적한 맛이 일품인데 백제 유민들의 한이 섞인 눈물이 일궈낸 맛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백제의 흥망성쇠의 비밀을 지켜 본 서천, 땅은 아무 말이 없지만 세월을 타고 내려오는 수많은 전설들이 이 땅의 서린 아픔과 추억들을 고스란히 후세에게 전해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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